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4·3이라는 죽음의 광풍 속에 숱한 아픔을 간직한 채 평생을 남모르게 울음을 삼키며 살아왔던 무명천 할머니. 그는 '진아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이름보다 무명천 할머니가 익숙하다. 얼굴을 감싼 무명천 때문이다. 무명천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의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2004년 9월 8일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는 4·3당시 고향 판포리의 오빠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순박하고 평범한 서른 다섯의 아낙이었다.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중령)를 새로 설치하여 강력한 토벌정책을 실시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 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돼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고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림 주둔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판포리 토벌이 이뤄졌고, 1949년 1월 무명천 할머니는 경찰 토벌대의 총에 턱을 맞고 만 것이다.
2008년 3월 25일, 월령리 무명천할머니 생전의 집을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여 오픈하였다. 진아영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이 헐리게 되자, 시민단체 사람들이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공동대표 정민구, 박용수)를 구성하여 4.3의 상징인 진아영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복원하여 알리자는데 뜻이 모여져 진행된 일이었다.
월령리가 인연이 된 것은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할머니를 언니가 월령리로 데리고 가서 살면서부터이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선인장 열매나 톳을 따다가 품팔이를 하면서 연명했다. 턱과 이가 없어 씹지를 못하니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는 늘 달고 다녀야 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이처럼 4.3사건의 후유증은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좌지우지했고,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1998년 다큐멘터리 제작단(감독 김동만)에 의해 ‘무명천 할머니’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대학가, 시민단체, 각종 행사에서 자주 상영되면서, 4.3하면 ‘무명천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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