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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권․평화기행/기행 및 기행해설

제주평화기행_3일차_새별오름과 관덕정(2017.10.28)

새별오름(519.3m, 애월읍 봉성리 산59-8번지)은 다섯 개의 돌출된 부분이 별 모양의 분화구여서 새별오름이라 불린다.

새별오름은 해방 이후 유격대(무장대, 자위대)의 훈련장이자, 한림면 유격대의 거점이자 서북부지역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정물오름과 다래오름을 연결시키는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름 정상에 올라보면 대정면부터 제주시 지역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이들이 갖춘 무기라고 해 봐야 일본군이 쫓겨나갈 때 버리고 간 구구식소총 몇자루에 도끼나 죽창 등이 전부였다.

이들이 부실한 무기를 들고 목숨을 바쳐 싸워야 했던 이유는 바로 미군정과 친일경찰, 서청 등 악질적 탄압 때문이었다.

4.3사건의 단초는 1947년 3월 1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최한 3.1운동 28주년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날 3만여명이 제주북국민학교에 집결하여 대회를 진행했는데, 이때 기마경찰이 한 아이를 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것을 지켜본 주민들이 "저 놈 잡아라"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면서 경찰을 쫓아갔다. 이 때 미군정과 제주경찰서가 위치한 관덕정 근처 망루에서 경찰의 발포가 일어나 주민 6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4 3특별법에서는 제주4 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1사건 직후 외지출신의 유해진(전북 출신) 지사가 부임하면서 호위병 형식으로 서북청년단(서청)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청은 친일경찰과 함께 제주 도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탄압했다. 그들로부터 자신들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자위대(무장대)였다.

그러던 중 1948년 3월 20일 애월면 새별오름에서 훈련 중이던 자위대원들과 애월지서 경찰·서청·대청단원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새벽오름 충돌이 4.3사건 진적 최초의 무장 충돌이다.

지금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들불축제 장소로 더 유명해진 새별오름에 제주4.3의 상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을 찾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역사는 기억하려는 자와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 간의 싸움이다. 제주 구석구석에 자리한 역사와 상처를 찾아내 평화로 승화시켜야 한다.

2박 3일의 제주평화기행은 아름답지만 슬프기도 한 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