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권․평화기행/기행 및 기행해설 썸네일형 리스트형 민주평통자문회의대전중구협의회 산내 골령골, 노근리 평화기행(2018.04.20) 제18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전중구협의회 자문위원들과 함께 평화통일현장 견학으로 대전 산내 골령골과 노근리 평화기행을 다녀 왔습니다. 다시는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상처가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기를 다짐했습니다. 더보기 대전 평화의 소녀상, 산내 골령골, 노근리 평화기행(2017.11.04) 대전 평화의 소녀상, 산내 골령골, 노근리 평화기행(2017.11.04) 더보기 산내 골령골, 노근리 평화기행(2017.11.09) 산내 골령골에도 가을이 깊었습니다. 오늘은 청소년들과 함께 대전 산내 골령골과 충북 영동 노근리 평화기행을 다녀 왔습니다. 설명하는 내용을 들은 청소년들은 이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자국의 국민을 군인과 경찰이 죽이고, 미군이 피난민을 학살한 일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더보기 제주평화기행_3일차_새별오름과 관덕정(2017.10.28) 새별오름(519.3m, 애월읍 봉성리 산59-8번지)은 다섯 개의 돌출된 부분이 별 모양의 분화구여서 새별오름이라 불린다.새별오름은 해방 이후 유격대(무장대, 자위대)의 훈련장이자, 한림면 유격대의 거점이자 서북부지역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정물오름과 다래오름을 연결시키는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름 정상에 올라보면 대정면부터 제주시 지역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이들이 갖춘 무기라고 해 봐야 일본군이 쫓겨나갈 때 버리고 간 구구식소총 몇자루에 도끼나 죽창 등이 전부였다.이들이 부실한 무기를 들고 목숨을 바쳐 싸워야 했던 이유는 바로 미군정과 친일경찰, 서청 등 악질적 탄압 때문이었다.4.3사건의 단초는 1947년 3월 1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최한 3.1운동 28주년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 더보기 제주평화기행_2일차_알뜨르비행장_섯알오름학살터_송악산진지동굴 등(2017.10.27)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배수탈정책으로 한반도 전체는 지옥이었다. 특히 말기 황국신민화와 병참기자화로 조선인들은 징용, 징병,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고, 전국토는 전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중 제주도는 해안에서부터 한라산 중턱까지 곳곳에 일제 강제징용의 현장이 남아 있다. 이른바 ‘결7호 작전’이라 하여 일제가 일본 본토수호를 위한 최후의 교두보로 제주도를 택했기 때문이다. 결7호 작전을 수행할 제58군이 신설되고, 예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 혼성제 108여단 등 모두 7만 5,000여 병력이 제주에 주둔하며 제주도 전역을 군사 요새화하기에 이른다. 그 일환으로 제주도 해안을 돌아가면서 동굴진지를 구축하는데, 이는 상륙하는 미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 해군의 자살 특공기.. 더보기 제주평화기행_1일차_4.3기념공원_너븐숭이기념관 등(2017.10.26) 맨 처음 도착한 제주공항(정뜨르비행장)부터 제주도 어느 곳인들 학살터가 아닌 곳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주도에 4.3관련 사적지가 597곳에 달합니다. 제주4.3은 친일파 등용, 적산처리문제, 미곡정책 실패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분단) 기도 등 미군정의 한반도 지배정책에 항거한 민족,민중투쟁이었습니다. 제주4.3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한 자가 당시 미군정 군정장관 윌리엄 딘(대전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을 가다 잡힌 딘 소장이 바로 그입니다). 4.3사건 관련자들이 수만명이 학살되었고, 학살을 피한 이들은 육지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후 또다시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습니다.(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도 학살자 7천여명 중 300여명의 제주 희생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군정 시기 뿐 아.. 더보기 9월 산책, <Dark Tourism 대전천 - 평화路의 산책>_산내골령골 해설(2017.09.24) 9월 산책, _산내골령골 해설(2017.09.24) 더보기 DMZ 평화기행(오두산전망대, 도라전망대, 도라산역 등, 2017.09.23) 아직도 아물지 않은 분단의 상처...그리고 한 때 회복중이었던 남북관계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을 다시 새기고, 상처를 치유하여 한반도 평화 번영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더보기 철도노조대전지방본부 평화기행(대전형무소, 산내골령골, 2017.09.08) 해방 후 대전형무소를 다시 채운 이들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 시도에 저행했던 이들...그리고 노동자, 농민, 인민들의 주권을 찾기 위해 투쟁했던 이들이었다. 1946년 9월 노동자들의 총파업 때에 대전의 철도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군시제사공장, 동아연필공장 등 시안의 주요공장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을 단행했다. 1948년 2월 7일, 2.7구국투쟁에서 대전철도노동자들은 ‘유엔조선위원단입국반대’,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들고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리하여 경부선, 호남선의 철도운행은 일시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들의 투쟁에 연대성을 표시하여 대전방직 공장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대전농업학교를 비롯한 대전의 중등학교 학생들도 시위투쟁을 벌렸다. 1948년 5.10단선반대투쟁을 위해 5월 8일 새벽.. 더보기 철도노조대전지방본부 평화기행(대전형무소,산내골령골, 2017.09.06) 철도와 더불어 대전에는 일본인들이 들어 왔다. 처음에는 철도 관련 기술자에서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게 철도수비대가 들어 왔다. 일본인들이 가족을 데리고 대전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일본일들을 위한 소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세웠다. 조선인들에게는 경찰, 헌병, 군대 등 억압기구로 탄압했다. 저항하던 이들은 감옥에 가두었다. 대전감옥(형무소)의 시원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가두던 중구금시설이었다. 해방이 되어 형무소 문이 열려 모두가 석방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무소가 가득 찼다. 절반은 경제사범이었고, 절반은 정치사범이었다. 미군정은 제대로 군정을 펼치지 못해 민생은 파탄났고, 절도와 자살이 늘어 났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앞세워 자신의 기득권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 단독.. 더보기 이전 1 ··· 5 6 7 8 9 10 다음